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산도 대첩 (문단 편집) == 배경 == >여러 장수와 군사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잇달아 쏘아대니, 그 형세가 마치 바람 같고 우레 같아, 적의 배를 불태우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다 해치워 버렸다. >---- >[[난중일기]], 7월 초8일 기사 [[선조(조선)|선조]] 25년(1592), 5월과 6월 사이 2차 출동을 통해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수군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로 이어지는 일본 함대를 상대로 일방적인 토벌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에 해안에서 일본군이 조선 수군에 의해 동쪽으로 밀려버리는 것을 염려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6월 23일자 명령을 통해 용인에서 주둔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다시 해안으로 급파하고, [[오다 노부나가]] 시절부터 수군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구키 요시타카]]와 그 외 [[가토 요시아키]] 등 3인을 소집하여 군대를 규합하여 조선 수군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조선 수군은 8월 12일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더불어 경상 우수사 [[원균]]의 함대 등 총 58척이 노량에서 합세했다. 참고로 [[임진왜란]] 발발 초기에 원균이 자침시킨 [[경상우수영]] 판옥선만 해도 편제기준 70여 척, 기록상 55척 이상이다.[* 이것이 원균이 이순신에게 열등의식을 품은 근본적인 이유이다. 당시 조선 수군은 일본과 가장 가까운 경상우수영의 함대가 가장 규모가 컸다. 따라서 같은 수사라고 하더라도 발언권이나 대우가 또한 다른 수영의 수사들보다 높았는데, 원균은 그 많은 함대를 한 번에 말아먹고 튀어버렸다. 그러니 아무리 최고대우를 받는 사령관이라고 하더라도 휘하에 함대가 없으니 아무 의미가 없는 직위가 되어버렸고, 패전 장수라는 불명예까지 안았기에 이순신의 휘하에서 종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열등감이 폭발하고 본인의 기존 성품까지 겹쳐 [[칠천량 해전|최악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다만 이순신도 [[난중일기]]에 함선 몇백 척이 느닷없이 부산으로 들이닥쳐서 시작된 전쟁이니만큼, 그 상황에서 함선을 자침시켰다는 건 지휘관이 누구였어도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고 기록한 바가 있다. 다만 그 이후의 행보가 더 큰 문제였다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